작가노트 – 전시 “세월 피에타 -집으로 돌아와”

야광, 2024

오작교 설화속에 드러난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

한국 전통 설화중에 그 기원이 4세기 훨씬 이전으로 추정되는 [오작교]이야기가 있다.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에 얽힌 설화는 예술작품으로는 덕흥리 고구려벽화(제작 408년,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볼 수 있다. 설화는 매년 칠월 칠석(음력 7월 7일)이 되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두 별이 아주 가까와지는 천문 현상과도 상관이 있다. 견우는 소를 끄는 목동(별자리 Altair)이고 직녀는 베를 짜는 여인(별자리 Vega)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사랑하던 연인 사이인 견우와 직녀는 옥황상제(천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지게 된다. 이 것을 불쌍히 여긴 까마귀들이 일년에 한 번 은하수 사이를 있는 다리가 되어 견우와 직녀가 만나도록 해주었다는 아름다운 설화는 전시회 [세월 피에타-집으로 돌아와] 의 배경 이야기이다.

오작교에 대한 나의 작업은 2011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독일 북서부 쥘트 Sylt라는 섬에 살고 있었다. 아침에는 동쪽 뻘바다로 가 해돋이를보고, 오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서쪽 Westerland로 가서 해지는 바다를 보고 돌아오는 단순한 생활에 젖어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지내면서 얼어붙은 겨울 바다에서 살고 있는 새들을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새 떼들이 무리지어 크게 곡선을 그리며 바다 위를 나는 모습은 나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바다 건너 뭔가 나를 부르는 듯한 ‘안타까움’, ‘닿지 못할 존재에 대한 그리움’ 그 느낌들은 말로 표현못할 ’슬픔‘이였다. 저 새떼들을 타고 거기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 새떼들은 [오작교]로 보였다. 거대한 군무를 추며 하늘과 땅사이를 잇고 있는 새떼들은 나의 마음속에서 ’헤어짐‘과 ’만남‘의 경계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면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이였다. 작업실로 돌아와 검은 밤바다 위에 은하수처럼 흐르는 새떼들의 오작교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작교 다리의 끝은 어디로 이어져 있었던가?

집, 가족, 사랑하는 사람의 품, 누군가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줄 사람,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 마음의 의지처, 이 미지의 끝에서 기다리는 햇살처럼 따뜻한 존재는 누구였을까? 왜 우리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걸까?

산자와 죽은자를 매개하는 나의 오작교

2014년 4월 16일 서남해 진도 앞바다에서 대부분 고등학교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침몰했다. 이 사고는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든 대참사였다. 십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도 당시의 아픔과 충격은 아물지 않았다. 총 304명의 희생자중 250명이 학생이였다. 하루 아침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너나할것 없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공감했으며, 대한민국 전체가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경위와 배후를 조사하면서 맞닥뜨린 진실의 민낯들은 인간들의 탐욕과 이기심이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드러낸 사건은 한국사람들의 가슴에 정화의 불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능한 부패세력을 기반으로 했던 대통령을 사퇴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사회 각계층에서 물질문명의 과도한 타락과 오류를 개선하는 반성이 일어났으며, 한국 사회에서는 촛불혁명이라는 인류사에 기록될 평화적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민중이 국가의 주체라는 역동적 힘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가 오늘날 현대 사회에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괴리로 인한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 백신과 같은 힘이다. 나는 예술작품을 통해 고통과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생동의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역사속에 희생자로서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목숨들이 아닌, 인류의식의 정화와 생존에 기여하는 의미있는 희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블랙 피에타]라는 작품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그리고 있다.

나의 [세월오작교]는 억울한게 죽은 아이들과 고통속에 살고 있는 유가족을 이별에서 만남으로 이어주는 오작교이다. 비록 물질계에서는 이별이지만 영계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초월적 사랑을 담고 있다.

서양의 과학적 이성중심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영역에 예술과 종교가 있다. 한국의 토속 신앙은 직업적으로 무당들이 전통음악, 춤, 제사의 형식을 굿을 통해 죽은자와 산자를 이어주는 빙의행위를 주관하여 죽은자와 산자가 한을 풀고 헤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샤만의 몸에 죽은자의 혼령이 들어와 가족들에게 못다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고 혼령을 하늘로 보내는 것을 ‘천도제’라고 한다. 무당들이 타인에게 몸을 빌려주는 빙의는 대단히 고차원적인 희생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무당들의 종교적 제의, 현실계와 영계를 이어주는 굿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전승되고 보호 받고 있다.

작품[세월 오작교]는 예술가로서 지내는 세월호 희생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천도제이다.

고인이 되신 백남준 비디오작가의 샤머니즘 퍼포먼스는 한국전통예술을 이러한 맥락에서 계승하고 있으며, 이분법적 사고와 이성중심의 서양문명의 병폐를 치유하고자하는 포스트 모던 예술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까마귀 상징에 나타난 천신숭배사상과 홍익인간

일월숭배는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종교로 전세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 2024년 한국의 역사는 단기 4357년,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을 시원으로 기록하며, [홍익인간]정신을 건국이념이자 통치 이념으로 삼아, 널리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인류애와 평등정신을 표방한다.

고조선은 태양을 숭배했다. 태양을 상징하는 까마귀는 고조선, 고구려의 상징으로 한국민족의 기원이 하늘, 천신의 후손이라는 단군신화를 가르킨다. 그래서인지 태양의 가운데 까마귀가 그려진 형상이 고구려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까마귀에 얽힌 설화나 신화가 자주 언급되니, 새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태양숭배와 샤마니즘의 깊은 연결을 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새를 매개자로 동경했으며 영매의 역할을 하던 샤먼이나 지도자가 날개같은 복식과 머리깃털장식을 쓰고 신의 말을 전달하고 영혼의 정화와 치유를 도와 온것이다.

오작교설화의 인류애적 상징성은 만남을 주선하는 것외에도 까마귀의 희생으로도 나타난다. 밤새 머리와 몸을 부딪히며 오작교가 되어 하늘을 나르던 까마귀의 머리가 상처로 하얗게 벗겨질만큼 매개자로서 아픈 희생을 감수한다는 것과 견우와 직녀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설화의 내용은 농사를 짓던 백성들에게 비의 귀함을 하늘이 보살피고 있다는 상징적 내용으로 한여름 가뭄의 걱정에 시달리던 농부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나의 [삼족오]작품들도 이러한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왜 오늘날 K-Pop, K-Culture, K-Art인가?

1999년 뒤셀도르프에서 유학을 시작하던 무렵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무엇을 배우러 독일에 왔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나는 막연히 서양예술이라고 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서양예술이 우수하고 위대한 문화여서 배우러 왔다고 하기에는 서양문화를 잘 몰랐기도 하지만, 한국문화가 열등해서 선진문명을 배우러 온 것처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25년을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동서문화의 교류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데 생을 바치고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서양문물과 기독교정신은 한국사회에 거의 무분별할정도로 마구 수용되었는데, 한국인으로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한국 고유한 문화를 가려내어 이것이 한국문화의 정수이며 우수성이다라고 내세울 만한 것을 찾기위해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그리고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많은 기쁨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에서 나에게 든 확신은 역사가 오래된 한국은 문화 부자나라였던 것이다.

내가 접한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예술의 전통과 한국예술의 전통을 접목시키는 데에도 서양인들의 잣대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정신의 줏대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이러한 줏대의 한 예로 한국전통사상 [홍익인간]을 들어본다. 거의 오천년 전부터 한국의 박애와 평등정신은 토속신앙 샤머니즘의 형태로 널리 깃들어 있으며, 이후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 마져도 수용하여 토착화 시킨 관대함과 물질계와 정신계를 아우르는 우주적 스케일이 있다.

오늘날 K-Pop , K-Culture 라는 한류의 인기의 저변에는 고조선부터 면밀히 어어져온 박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신명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신과 소통하는 매개자가 신명을 내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굳어진 집단사회의 문제점을 신명나게 춤추고 노래하면서 풀어내는 힘, 혐오대신 해학으로 웃으면서 풀어내는 힘, 인간중심에서 자연과의 교감으로 풀어내는 힘을 ‘풍류’라고도 ‘신명’이라고도 할 수 있고 풍류는 한국인들의 기질과 격을 보여주는 유전적 우수성이다.

21세기 물질문명이 주도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 기술은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환경파괴와 에너지 고갈, 전쟁과 전염병등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갖 생존의 위협속에서 함께 공존하기를 모색해야 한다.
결국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부터 한 발자욱 나와 자유롭고 새로운 정신중심의 세계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대안으로 한국 전통예술과 동양철학, 동양의 종교들에 들어있는 수행적 가치 그리고 한국의 토속 신앙, 무교속에 깃들은 ‘홍익인간’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물질만능의 타성에 젖은 현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한국전통예술- 고구려고분 벽화에서 가져온 레퍼렌스

고구려고분벽화는 3세기-7세기에 걸쳐 제작된 벽화예술로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던, 중국 집안 일부지역과 현재 북한에서 발굴된 100여개의 고분벽화이다. 당시의 시대상과 종교관을 엿볼 수 있은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신도는 북- 현무, 동-청룡, 남-주작, 서-백호로 사방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물을 신으로 그린 작품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으며,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반인반수를 신으로 표현하여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정복과 지배대상으로 본 서양의 관점과 다르다.

동양에서는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신성시 했다. 이 차이를 환경파괴가 인류생존을 위협하는 21세기에 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고구려벽화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잇는 영혼 불멸의 내세관을 담고, 현실의 고통으로 부터 초월할 수 있는 순환적 윤회관을 보여준다.

율동적이고 역동적인 선으로 표현된 생명력은 신명과 풍류의 유희적 놀이속에서 우주적 힘을 표현한다. 미시적이며 거시적인 율동속에 신도 인간도 하늘도 땅도 보이지않는 힘으로 한 데 엮여 춤을 추듯 접화군생하는 모습이 신명이 난 모습이다.

나의 기법: 정지된 면에서 신명난 춤추는 선으로

나의 회화 기법은 신명의 상태에서 나오는 춤추는 선이다.
일반적으로 동서양 화법의 차이를 재료적 측면에서 찾기도 한다. 서양에서 유화를 그리고 동양에서는 수묵, 수채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재료적으로 유화는 수채에 비해 견고하고 물질성이 강력하다. 나는 이 견고함의 재료성과 이미지성에서 답답함을 느꼈고 면을 위주로 서양화가 변화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그리는데 있어서 면의 요소가 중요했고, 반면 동양화에서는 선을 위주로 변화해왔으며, 선이라는 요소는 비물질적이며, 보이지않는 정신성, 힘이나 운동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는 차이를 깨달으면서 ‘신명의 선’을 발견했다.

선의 요소가 활발할 수록 그림은 물질계의 이미지적 요소를 초월해 비현실적일 수 있다. 존재하면서 비어있는 중첩상태, 현대 물리학을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양자중첩상태를 회화로 표현하는데 선의 요소가 적합하다고 여긴다. 무겁고 견고한 면을 버리고 선의 부드럽고 가벼운 도약으로 나아가면서 물질계의 집착을 버리고 영혼계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수행의 방법으로 적합한 것이다.

물질계의 공함을 깨달으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나의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고통받는 영혼의 치유이다. 그래서 사회적약자에게 관심이 많다. 노동자, 민중, 소외된 계층, 착취와 억압의 대상들,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예수나 부처, 모든 성인들의 메세지와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착취하는 구조는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술의 주제를 물질계의 공(비어있음)함을 깨달으면, 현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비어있으며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상태이며, 비어있음이 신성이며, 신은 사랑이며, 신은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다는 명제를 예술로 표현하고자 한다.

몸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에고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 공명의 상태에서 고통받는 타인을 연민하는 것으로부터 인류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타인을 연민할 때 마음의 오작교가 연결된 것이다.

 

나는 너의 존재를 존중한다.


최태만/미술평론가, 2023

빛의 화살이 네 방위로 뻗어나가 심장을 상징하는 도형을 관통하는 이광의 <어머니에게 가는 대문>은 복잡하고 상징적인 도상과 다양한 색채로 구성된 ‘이야기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 X자로 교차하는 화살의 중심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그녀를 둘러싼 아이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서 성모 마리아나 아이를 잡아먹는 악귀였으나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가정과 아이를 수호하는 모신(母神)이 된 하리티(Hāritī)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회오리치는 악령에 둘러싸여 있으며, 뱀의 비늘과 독초의 이파리를 가진 이 무시무시한 괴물은 사람을 집어삼키거나 물어뜯고 있다. 혼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긴 칼을 든 인간이 어머니와 아이를 협박하고 어떤 인간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시간의 화살에 마치 깃발처럼 나부끼는 천에는 ‘약육강식’이란 글자가 뚜렷하게 적혀있는데 화면을 둘러싼 사각의 틀에는 다소 엉뚱하게도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동요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종교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채와 신비로운 화면구성, 화면을 빈 틈 없이 꽉 채운 ‘여백공포(horror vacuum)’, 교훈적인 의미를 지닌 도상 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신열에 들뜬, 그러나 도덕적인 경고를 담은 동시대의 신화화(神話畵)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오른쪽 위의 태양 속에서 삼족오는 이 대혼돈을 지켜보며 어머니를 향해 보호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이광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은 권력의 폭력 앞에 희생당한 사람,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 더 나아가 감정이입과 공감이다. 동정(sympathy)은 고대 그리스어 ‘심파테이아(συμπάθεια)’에서 유래한 것으로 ‘함께(syn)’와 ‘고통하는(pathos)’이란 단어를 합성한 것이라고 한다. 비잔틴양식을 차용한 <가난한 자의 어머니>나 인종을 나누는 피부색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문제를 제기하는 <블랙 피에타>,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검은 예수> 등은 모두 밑바탕에 이러한 감정적 동화(同化)를 깔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유학(儒學)에도 나타난다. 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을 사단(四端)이라 하는데 그중에서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심파테이아와도 상통한다. 사단은 도덕정치를 주장한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정신으로 발현하기도 했으며, 성선설의 바탕을 이룬다.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이자 인간다움의 근거이기도 한 이타적 마음과 양심을 중시했다. 그는 『명상록』에서 “신들을 존경하고 서로를 보살펴라. 인생은 짧다. 이 삶의 열매는 좋은 성품과 공익을 위한 행동이다”라고 설파했다. 공익을 위한 행동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작용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는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의 상호연결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해 자주 묵상하라.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으므로 서로 친화력을 가진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대 신화에서 온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은 이러한 정신의 뿌리이자 실천이라 할 수 있으며, 이광은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시각화한다.

동정이나 공감과 비슷한 마음의 상태 혹은 태도를 미학에서는 ‘감정이입(Einfühlung)’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독일어의 ‘안에(ein)’와 ‘느끼다(fühlen)’를 결합한 것이므로 ‘들어가서 느낀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광의 작품은 ‘들어가서 느낀 마음의 상태’를 회화로 표출한 결과이다. 그래서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검은 예수는 ‘내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동일한 것으로 된다. 신화는 그의 작품에서 단지 ‘옛날 옛적에’로 그치지 않고 동시대의 모순과 질곡을 고발하는 도상 속에서 부활한다. 전쟁과 테러는 물론 차별과 혐오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온갖 폭력이 일어나는 21세기의 지구를 내려다보는 태양은 자멸의 길로 치닫는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인 빛을 비추고 있다. 그 속의 삼족오는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을 상징하므로 인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함을 웅변한다. 결국 이광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으로 향한 경외이며, 그것은 나는 너의 존재를 존중한다는 태도로 나타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최태만/미술평론가·국민대학교 교수, 2023

도처에 편재하는 슬픔

이광이 2022년 ‘검은 피에타’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진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 중에서 <아프리칸 상투스(African Sanctus)>는 검은 피부의 성모마리아가 역시 짙은 갈색의 어린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작은 크기의 그림이다. 이 작품은 비잔틴 성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지만 검은 피부 못지않게 성모의 광배를 아프리카 토착 장신구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두 개의 짐승 뿔을 엮은 특이한 머리 장식은 이 작품이 기독교의 성상과 아프리카 전통미술을 결합한 것임을 드러낸다. 기독교에서 예배 때 하느님의 거룩함을 찬미하는 교회음악인 상투스(Sanctus)를 아프리카 전통음악과 결합하여 ‘아프리칸 상투스’로 발전시킨 데이빗 판샤워(David Fanshawe)의 음반 자켓에서 얼굴에 붉은 화장을 하고 뿔로 만든 장신구를 쓴 흑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광의 <아프리칸 상투스>가 이 자켓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모마리아의 이마에서 마치 선혈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색은 인도인들이 이마에 찍는 빈디(Bindi)를 떠올리게 하므로 <아프리칸 상투스>는 기독교적 도상에 아프리카와 인도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융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광의 ‘블랙 피에타’에 나타난 이러한 ‘혼종성(hybridity)’은 문화의 단일성을 비판한 호미 바바(Homi Bhabha)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론과도 맞닿아있다. 바바는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 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기이하고 섬뜩한 것(das unheimliche)’이란 개념을 가져와 식민지 상황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친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이중적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분단이 만든 정치적 대립과 남한에서의 급속한 경제성장,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압축적으로 경험한 이광은 독일로 유학해 통일 이후 독일의 사회상황과 유럽에 여전히 남아있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유산을 목격했다. 법적으로든, 제도적으로든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차별적 표현을 ‘사회적 금기’로 여기는 환경이 조성되었을지라도 일상에서 그것이 완전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유색인종이 여전히 하층계급을 형성하며 힘든 노동에 종사하며 신분이나 계급을 상속받는 것은 물론 지배계급이 만든 제도와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콜로니얼리즘이 남긴 유산이자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도 지속되는 이중적 정체성의 원인이다. 이광의 질문은 여기로부터 시작한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차이와 차별이 없는 평등한 땅인가?

이광의 작품에 나타나는 혼종성은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으로 국한할 수 없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검은 피에타’ 시리즈 중에서 <형영상조(Body and Shadow pitying each other)>를 보면 용, 복희(伏羲)와 여와(女媧), 금시조 등처럼 동아시아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상상의 동물이나 신화적 도상도 나타나고 있다. <Summoning a Soul>에서는 금색의 배경에 김소월의 시 <초혼>을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한 한글로 둘러싸도록 구성하였으며, 측은지심이란 글자가 마치 부적처럼 네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자의 어머니>에서는 각 10개의 칸으로 나눈 사각형 속에 꿀벌을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화면의 아래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실은 낙타를 모는 대상(caravan)과 어깨에 거대한 포도송이를 지고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흰색의 실루엣으로 표현함으로써 작품을 복잡한 상징과 알레고리의 세계로 이끈다. 더욱이 성모마리아의 한쪽 눈에 그려진 사랑의 앰블렘인 하트모양은 화면 속의 또 하나의 액자에서 부릅뜬 눈을 둘러싼 도형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기독교, 불교, 무속적 도상과 어지럽게 중첩되며 평면을 채우고 있으므로 화면은 중세 기독교의 필사본 삽화나 불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백공포(horror vacuum)’와 같은 상태를 보여준다. 혼종성과 여백공포는 ‘검은 피에타’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자 이 작품이 특정 종교에 대한 비평이거나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대해 작가가 가진 생각과 감정이 투영된 결과임을 깨닫게 만든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마리아를 표현한 것이 피에타이기 때문에 검은 피에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조를 슬픔으로 규정하기에 이 작품들의 의미는 복잡하다.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나 통렬한 절규는 아니라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잔잔하게 스며드는 비애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검은 피에타에서 도처에 편재하는 슬픔을 본다. 이 슬픔에의 자기동화가 바로 이광이 추구하는 연민과 공감의 뿌리이기도 하다.

신들린 광기 또는 해방

방탄소년단(BTS)의 ‘쩔어(Dope)’를 아시나요? 나는 이광의 ‘광풍류(光風流)’를 통해 이 매력적인 청년들이 부른 신나는 노래를 알게 되었다. 2021년 이광은 베를린 한국문화원에서 등에 한자로 ‘광풍류(光風流)’라 적은 겉옷을 입고 BTS의 노래, 한국의 명인 박병천의 <시나위 살풀이>,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마태 수난곡(Matthew Passion)> 등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리듬에 몸을 맡기듯 붓을 휘두르는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발표한 바 있다. 나는 물론 이 퍼포먼스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이 영상을 보았다. 제한된 정보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비트가 강한 노래가 나올 때는 빠른 속도의 붓질로, 구성지고 비장한 가락은 느린 흐름으로, 예수의 수난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중하면서 바로크적 격정을 느끼게 만드는 음악에는 호소하거나 절규하듯 움직이는 작가의 몸짓을 보며 신들린 선율에 영혼을 맡긴 무당(shaman)을 떠올릴 수 있었다.

원시종합예술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은 제의(祭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시, 음악, 무용, 연극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신을 찬미하며 행했던 제의를 ‘코레이아(χορεία)’라 불렀다. 이러한 종교적, 예술적 활동에서 사제가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 열광적인 상태에 몰입하는 것을 ‘엔토우지아스모스(ἐνθουσιασμός)’라 한다. ‘신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지닌 이 용어는 오늘날 영어에서 ‘열광(enthusiasm)’을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향연(Συμπόσιον)』과 『파이드로스(Φαῖδρος)』에서 에로스를 미를 향수하려는 정신의 강렬한 파토스적 충동으로 규정했다. 불완전하며 광기에 가까운 이 감각적 충동으로부터 지고의 단계를 지향하고자 할 때 정신이 절대적 존재와의 조화에 의해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최고의 쾌에 도달한다. 그는 그것을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 즉 ‘엑스타시스(ἕχστασι󰐠)’라고 했다. 이광의 광풍류 퍼포먼스에서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자기해방으로 향한 몸짓, 즉 열락(悅樂)의 무아지경이다. 나는 이광의 몰입에서 ‘신들린 광기’를 본다.

부르크하르트가 ‘인간과 세계의 발견’으로 규정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신들린 광기(furor divinus)’는 피치노(Marsilio Ficino)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에게 중요한 주제였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정치, 시학, 조형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간은 우울한 존재라고 했는데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멜랑코리를 플라톤의 신적인 광기와 동일시했던 것이다. 훗날 도상해석학은 뒤러(Albrecht Dürer)의 <멜랑코리아Ⅰ>를 중세의 점성술,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 문헌 등을 근거로 ‘신적인 멜랑코리’를 표현한 정신적 자화상이라고 해석했다. 이성이 잠에서 깨어난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광기는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었음을 고야(Francisco Goya)가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라 불리던 시골집 벽에 그린 어두운 그림이나 ‘변덕(Los caprichos)’과 같은 판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이광은 2004년부터 2006년에 걸쳐 고야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고야의 동판화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를 모티브로 하였으나 표현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광기를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것으로 폄훼하기보다 예술의 동인으로 볼 때 예술의 중요한 한 측면인 디오니소스적 열광과 도취, 황홀경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샤먼으로서 예술가는 초자연적인 주술이나 마법을 동원해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과 심령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도로 예민한 감각과 정신을 지닌 존재란 점을 받아들일 때 보이스(Joseph Beuys)나 백남준이 추구한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광의 광풍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 열광적인 상태이거나 종교적 신비체험(ecstasy) 또는 법열(法悅)은 아니다. 선율에 몸을 맡김으로써 한없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휘두른 붓질은 화면 위에 선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이 흐름은 그의 숨이자 기(氣)의 길이며 추상표현적 평면으로 종결된 결과물로서의 회화는 재현할 수 없는 감각의 흔적이다. 이광이 광풍류에서 표현한 ‘광풍’이란 화창한 봄날에 부는 산들바람을 말한다. 따라서 표현적인 격렬함이나 신들린 듯한 선율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의 표출이라기보다 정신의 해방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지혜(prajñā)의 완성(pāramitā)’이란 뜻과 함께 ‘저 세계에 이르다(到彼岸)’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만약 후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번뇌의 강을 건널 때 고요한 마음의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없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데 작가에게 그것은 일종의 자기포기와 같은 것이다. 이광의 작업은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투쟁과 자기포기의 과정을 격정적인 형식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손길이 스쳐간 흔적을 마음의 파문으로 읽는다.

이광의 광풍류에서 <카르마의 자유(Liberation of Karma)>는 박병천의 살풀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탓인지 춤을 추는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고 있으나 재현된 이미지의 유혹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운 선이 만들어내는 율동, 에너지의 수렴과 확산이 만들어낸 유동하는 선과 색채와 만날 수 있다. 즉흥적이면서 자율적인 화면에 남아있는 것은 빠른 필치의 선과 원색의 빛, 그리고 작가의 긴장된 숨결이 응축되고 쌓인 표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이 작업에 ‘카르마의 자유’라고 이름 붙였을까.

고대 힌두교 사상에서 탄생한 카르마란 관념을 불교에서는 업(業) 또는 업보(業報)로 번역한다. 카르마는 전생의 행위가 낳은 결과이므로 윤회(Saṃsāra)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시작도 끝도, 방향도 목적도 없는 방황의 순환’을 의미하는 윤회의 굴레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해탈(Moksha) 또는 열반(Nirvāṇa)이라 한다. 이러한 인과사상은 불교에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로 나타난다. 삶이 고통임을 깨닫고 온갖 허망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고통의 원인을 소멸할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이 모두 공(Śūnyatā)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과 재액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광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집착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2009년에 호를 무아(無我)로 지은 후 활동하고 있다. 호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대승불교의 공사상은 물론 노장사상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하고 있다. 그래서 『도덕경』 제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상의 선은 물과 같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공을 다투지 않는다’는 문장을 자신을 다스리는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샤머니즘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신화의 세계는 그의 작업을 상징과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원천이다. 이광의 작품은 추상과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 경계를 넘나든다. 주관적 감정의 표출과 내면적 비전은 화면을 고양된 표현적 열정의 세계로 이끈다.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미토스(mythos)에 더 가까운 그의 생각과 작업은 따라서 ‘결정론(determinism)’ 아니라 ‘생성’이자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의 존엄함

이광의 초기 작업에는 미술사의 참조와 인용이란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이 많다. 모든 미술사가 아니라 중세 고딕, 북유럽 르네상스, 고야, 고흐(Vincent van Gogh) 등 인간의 고통을 숨김없이 표출한 사조나 작가가 그의 관심과 연구를 자극했다. 예컨대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 뒤틀린 손만 클로즈업한 작품은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의 <이젠하임의 제단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손을 떠올리게 만든다. 책형을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으로만 표현한다면 예수가 겪었을 처절한 고통이 가려질 수도 있다. 신앙심이 깊은 신자라면 이 제단화에 여전히 남아있는 고딕의 야만적이고 거친 표현에 불쾌감을 느끼기보다 죄인인 인간을 위해 순교한 예수가 마지막으로 느꼈을 인간적 고통에 동화하여 마치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2005년부터 2008년에 걸쳐 해골과 같은 바니타스(vanitas)를 통해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고찰을 하던 그는 ‘책형’ 연작에서 긴장으로 뒤틀린 발가락, 절규하며 벌린 입에서 드러난 이빨, 휑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발하는 눈, 단백질 덩어리로서의 살점 등과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만 강조한 형상을 통해 고통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시도했다.

고통을 미화하지 않을 때 회화의 진실은 비상한 흡인력을 발생시킨다. 이것을 회화의 카리스마 또는 아우라라고 부를 수 있다. 이광은 슬픔에 빠진 노인의 웅크린 자세를 자기언어로 해석하여 자기 방식으로 다시 그리며 그 슬픔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연민의 감정이다. 그 연민과 공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작가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이 그를 자연스럽게 자기표현이 가능한 미술로 이끌었다. 홍익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로 유학하여 뒤셀도르프미술대학에서 신표현주의 경향의 회화로 주목받던 뤼페르츠(Markus Lüpertz)에게 배웠다. 이광의 작업에는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예언적 생명력’을 강조한 지도교수로부터 받은 영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에서 20여 년간 활동하며 이광은 독일 사회에 동화하기보다 이방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더 숙고했다. 특히 대학에 재학하던 1995년 휴학을 하면서까지 결행한 인도여행은 ‘고통받는 자’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고 그들에 대해 각성하도록 만들었다. 성스러운 종교적 열정과 불가촉천민의 지독한 삶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인도 여행의 기억은 후에도 트라우마처럼 따라다녔다. 여기에 덧붙여 통일하였으나 독일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전쟁과 분단의 기억, 유럽으로 유입된 유색인종들이 ‘타자’로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 신자유주의, 전쟁은 대지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의 고통을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이광이 베를린에 개설한 대안문화공간에서 일본 군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는 물론 교전국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이자 성노예제도인 ‘위안부’를 주제로 전시와 문화행사를 기획한 것도 고통을 역사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비인간적 폭력은 단지 전쟁, 테러, 범죄와 같은 물리적 충돌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 성, 세대, 계층간 갈등의 원인인 차별에 의한 폭력은 인간의 신체는 물론 마음을 병들게 만든다. 여기에 인간이 자연에 가한 폭력은 생태계의 파괴와 기후위기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이광은 가해와 피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과적 상호관계를 주목한다. 그래서 타자를 괄호로 묶어 ‘타자화’하지 않고 내가 타자일 수 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강렬한 주관적 비전 속으로 흐르는 모순된 상황의 수용과 공감의 정서는 자기정화와 자기치유란 일차적 목적으로부터 출발하여 타자로 향한다. 즉 그의 작품은 타자에의 감정이입과 소통을 향한 창구이다. 공감의 존엄성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에 대한 책임을 공감함으로써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유를 떠올리게 만든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탐구하는 그의 작업은 고통의 통렬한 수용을 통해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예술적 열정의 결과이며, 그래서 그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아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초월하는 혁명은 지금, 여기로부터. 아직 늦지 않았다.

 

 

약자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현대 종교화


최광진, 미술평론가, 2022

근대 이전까지 미술의 주제는 대부분 종교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성전을 장식하거나 포교를 위해서 경전의 이야기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그래서 일반인과 다른 성인들의 거룩한 모 습을 도상을 통해 구분하거나 그들의 일화를 미화하여 표현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종교적 도 상이나 일화로 사랑이나 자비 같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을까? 기독교 내부에서 한때 성상 파괴령이 내려진 것은 자칫 성상이 본질을 왜곡하는 우상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 작가들은 미술의 자율성을 명분으로 작품의 주제를 사회 현실이나 자신의 내면으로 전 환함으로써 종교에 봉사해 온 종교화의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광의 작품은 기독교의 오랜 주제인 <피에타>를 통해 종교화의 전통을 현대 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녀의 종교화는 기독교의 교리를 전하기 위한 도 구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감정을 감각적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표현주의적인 특징 을 보여준다. 그녀가 추구하는 종교적 감정이란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가능한 사 랑과 용서, 그리고 약자에 대한 연민 같은 인간 본연의 마음이다.

그녀가 이러한 종교적 감정을 예술의 주제로 삼게 된 것은 운명적으로 대학 시절에 경험한 인도 여행에서 비롯된 듯하다. 인도에서 그녀는 길을 잃고 우연히 빈민촌에 들어가게 되었는 데, 그곳에서 길바닥에 시체처럼 누워 죽어가는 사람들의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경 험이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 힌두의 신들과 붓다의 유적지들을 돌아보면서 그녀는 인간의 고 통과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지배자들에게 착취당하며 미천하게 살아가는 흑인 노동자들이나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도는 난민들, 그리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남다른 연 민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연민은 자신의 불행했던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평생을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껴왔 다. 불행한 가족사에서 비롯된 극심한 심리적 고통에서 그녀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비로소 마 음의 평안과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배경은 유대인 학살을 경험하고 고통받는 타자의 문제를 철학의 주제로 삼은 프랑 스의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에게서 신의 얼굴 을 발견하고, 연민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타자를 향해 ‘나’를 넘어서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레비나스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하듯이, 이광은 착취당하는 아프리카 흑인을 피에타의 주제인 성스러운 마리아와 예수로 대체하였다. 여기에 꿈틀대는 용 의 꼬리나 반인반수 같은 자신의 무의식적 환상을 가미했다.

고통과 환희, 죽음과 부활,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이러한 작품은 고구려 벽화처럼 신명 나는 열기와 에너지로 충만하다. 이러한 작품에서 주목되는 건 어떤 종교적 일화가 아니라 고 통과 상처받은 마음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강렬한 에너지다. 그녀는 마치 굿을 하는 샤먼처럼 사회의 폭력성과 살기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정화하고 치유한다. 이러한 이광의 작 업은 마음에 응어리진 한과 트라우마를 풀어내어 치유하는 살풀이춤과 같은 메커니즘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뿌리 깊은 샤머니즘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